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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인물_Hot issued figure

[꿈을 좇는 사람들] 풍운아 최향남 투수를 아시나요?

by 좀thethethe 2021.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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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선수 최향남에 대해서 2006년 8월 24일 포스팅한 글인데요.

당시에 제눈에는 Purse a dream 하기 위해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는 최향남 선수가 너무 멋있었습니다.

그래서 포스팅을 한것이고요. 

 

 


풍운아 최향남

 

 

'최향남' 인물 정보

이름   : 최향남

출생   : 1971년 3월 28일

신체   : 키 187cm, 체중 83kg

출생지: 전라남도 신안

학력   : 영흥고등학교 

경력:  경력   : 1996년 ~ 2004년 LG 트윈스
           2005년 ~ 2005년 기아 타이거즈
           2005년 11월 버팔로 바이슨스(클리블랜드 트리플A)

프로데뷔: 1990년 해태 타이거즈 입단

포지션   : 투수

소속팀   : 버펄로 바이슨스

 

 "꿈이 있어 행복하다."

 

야구를 좋아하는 내게 최향남은 그저그런 투수의 이미지로만 남아있었다. 그런데 그가 적지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2005년 초 미국 메이져리그에 도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혹자들을 무모한 도전이라고 또는 환상만을 쫓는 피터팬 신드롬에 젖어있는 철없는 한 인간이란 혹평이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난 누구보다도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반드시 성공해서 영화같은 스토리의 주인공이 꼭 되어줬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경영적 측면에서 보자면 슘페터(Schumpeter)란 이름이 불현듯 스쳐지나간다. 슘페터적 관점에서 보자면 남들이 봐서도 좋은 투자처에 투자하는 것은 기업가 정신이 아니라고 했다. 그보다는 남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곳, 망설이는 곳, 무모하리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이끌어내는 투자와 그로인한 성공이야 말로 진정한 기업가라는 것, 즉 새로운 혁신가를 기업가로 정의한 것이라고 하겠다.

슘페터 세대에 최향남이 있었다면 충분히 그로부터 칭찬받을 만한 도전이 아닐까?

물론 아직 그의 도전은 현재 진행형이긴하다. 아직도 트리플A에 처한 상황도 그러하고 많은 나이와 그에 따른 체력, 의사소통 등 풀어야할 난제들이 산적하지만 그래도 기대를 해본다.

 

물론 슈퍼스타 감사용이라는 야구영화가 있었다. 패전처리용 투수를 주인공으로한 영화였다. 영화는 물론 흥행에 실패했다. 이유는 여러가지 있겠지만 아무리 아무리 낡고 닳은 공식이긴 하지만 권선징악, underdog이 성공하는 이야기야 말로 진정 우리의 흥미를 끌수 있고 오래기억되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최향남선수를 보면 꿈을 좆는 그의 도전이 참 멋있다. "꿈이 있어 행복하다"라는 그의 말은 비단 그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아닌것 같다. 많은 underdog들에게 희망을 주는 최향남.. 그의 성공을 기대해 본다.


그런데 15년 가량 지난 2021년 그의 행적을 알아보니 이렇게 많은 도전을 해왔더랍니다.

이렇게 한국, 미국, 일본 심지어 호주까지 수많은 도전을 한 야구선수는 많지 않을것 같습니다.

다시 언급하지만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슈퍼스타 감사용"이라는 영화도 있죠.

관객들은 항상 결과가 1등으로 혹은 우승으로 끝나는 영화같은 주인공의 얘기들에 매료되고 박수를 보냅니다만

저는 오히려 아름다운 도전 자체에 박수를 보냅니다.

최향남의 야구히스토리는 놀랍습니다.


 

 

한국 프로야구 시절

해태 타이거즈 시절

1990년에 입단하였다. 5경기에 등판하는데 그치고 이듬해 현역으로 입대해 군 복무를 마쳤다. 제대 후에도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해 1996년 11월 6일 최훈재를 상대로 LG 트윈스에 트레이드됐다.

LG 트윈스 시절

트레이드 뒤 1998년에 12승 12패를 거둬 팀의 에이스 역할을 했으나, 2003년에 부상으로 1경기도 뛰지 못해 부진에 빠져 시즌 후 방출됐다.

KIA 타이거즈 시절

2003 시즌을 재활에만 전념하다가 2004년에 친정 팀으로 복귀했다. 2시즌 동안 4승 6패를 거뒀다.

미국 프로야구 시절

그는 MLB 진출의 꿈을 버리지 않았고, 2006년에 미국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산하 트리플 A 구단인 버펄로 바이슨스에 진출해 34경기(선발 11경기)에 등판 8승 5패, 2점대 평균자책점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MLB에 콜업되지 못한 채 재계약에 실패하고 2007년에 한국으로 복귀했다.

한국 프로야구 복귀

롯데 자이언츠 시절

2007년에 입단하였다. 2시즌 동안 172이닝, 7승 16패를 기록했다. 2008 시즌 2승 4패, 9세이브를 거두며 팀의 9년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끌어냈다.

미국 프로야구 복귀

2009년에 다시 미국으로 진출해 LA 다저스 산하 트리플 A 구단인 앨버커키 아이소토프스에서 구원 투수로 활동했다. 첫 해에 9승 2패,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2010년에는 1승 2패, 5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해 트리플 A에서 활동하는 투수로는 부진해 2010년 7월 2일에 방출됐다.[1]

일본 독립야구 시절

2010년 7월 2일 이후 일본 독립 리그에서 활동하다가 한계를 느껴 한국에 복귀했다.

한국 프로야구 재복귀

롯데 자이언츠 복귀

2011년에 이적을 통해 3년만에 친정 팀으로 복귀했다. 3월 25일 시범경기 때 2이닝 1실점을 기록했지만 그 후 팔꿈치 통증에 시달리며 시즌 중 방출됐다.

KIA 타이거즈 복귀

은퇴 위기에 몰렸으나 현역 연장 의지를 보여 수술 대신 재활한 후, 컨디션을 다시 끌어올려 당시 감독이었던 선동열의 부름을 받아 2012년 5월 22일에 입단 테스트를 받고 친정 팀에 돌아왔다. 이로써 한 선수가 같은 팀 유니폼을 3번이나 입는 진기록을 세웠다. 한기주의 부상으로 그가 마무리 보직을 대신 맡았고, 2012년 7월 25일 넥센 히어로즈전에서 세이브를 올려 최고령 세이브 기록을 경신했다.[2] 2013 시즌 후 다시 해외 진출을 위해 팀을 떠나기로 했다.[3] 스프링캠프의 초청 선수로 들어가서 재진출을 모색하려고 계획했으나, 미국행이 불발됐고[4], 결국 미국행을 포기했다.

한국 독립야구 시절

고양 원더스 시절

2014년에 입단하였다. 같은 해 KBO 퓨처스리그 교류전 5경기에 등판해 9.1이닝동안 1승 1패, 3점대 평균자책점으로 시즌을 마쳤다.

오스트리아 프로야구 시절

고양 원더스가 해체되자 2015년에 전 SK 와이번스의 투수 황건주, 전 롯데 자이언츠 트레이너 하승준과 함께 비너노이슈타트 다이빙 덕스 입단을 통해 오스트리아로 진출했고 그 해 눈부신 피칭으로 팀을 정규 시즌 4위로 이끄는데 공을 세웠다. 이에 힘입어 정규 시즌 MVP로 선정됐다. 또한 포스트시즌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선보이며 팀을 오스트리아 시리즈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야구선수 은퇴 후

오스트리아에서 1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친 후 2016년 초에 아이티로 건너가 야구 재능 기부를 하겠다는 계획을 언급했으나 생각을 바꿔 2016년 8월 10일부터 경북 문경에 있는 국제 학교인 글로벌선진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이듬해인 2017년 후진 양성에 힘쓴 공로로 한은회 시상식에서 공로패를 수상했다. 그러나 아마야구 지도자 자격이 없는 관계로 실질적으로는 다른 감독이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2019년까지 글로벌선진학교를 이끌다가 같은 해 12월 9일 CBL 상하이 골든이글스의 투수 코치로 부임하며 중국으로 진출했다.

 

내용출처 : 위키백과

최향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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